호손효과(Hawthorne effect)란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해서 본래의 자신의 본성과 다른 행동을 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호손효과는 사회조사실험에서 자주 나타나는데 실험대상자들이 자신들이 실험 하에 있다고 의식하여 아무도 지켜보고 있지 않는 상황과 달리 행동하는 것을 설명합니다.
1920년대 전구를 생산하는 호손공장에서는
직원들의 생산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을 알아보기 위한 실험을 진행하였습니다.
이에 연구자들은 작업시간과 휴식, 임금 등의 요소들이 생산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이러한 요소들은 생산성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도 실험 도중에는 생산성이 오르고,
실험이 끝나면 다시 생산성이 떨어지는 현상이 반복됐습니다.
직원들이 자신들이 테스트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실험은 비밀스럽거나 자연스럽게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테스트 당하고 있는 직원들은 적절히 대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지켜볼 때 더 열심히 공부했던 것과 같습니다.
2015. 12. 27. 20:28 카테고리 없음
영화 은교의 명대사
커피의 기원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커피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정확한 기록이나 문헌이 남아 있지는 않아요. 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기원전 6세기 무렵 에티오피아에서 염소를 기르던 목동 칼디(Kaldi)의 얘기를 커피 기원의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홍해 근처의 수도원 언덕에서 염소를 돌보던 어느 날, 칼디는 염소들이 덤불에서 붉은 열매를 조금씩 갉아먹으며 즐거운 듯 춤추며 도는 것을 보았죠. 이상하게 여긴 그는 그 열매를 따서 씹어보았고, 그러자 독특한 맛이 나고 기분이 좋아졌어요. 이 사실을 전해들은 승려들은 커피 열매가 정신을 맑게 하고 피로를 덜어준다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이후 수도승들은 기도할 때 졸음을 쫓기 위해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고 여러 사원으로 전파하였어요.
이런 커피가 세계인의 음료로 자리잡기까지는 이슬람교도의 역할이 컸어요. 역사가들은 11세기 초에 아라비아 무역상들이 예멘으로 커피나무를 가져오면서 커피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봐요. 이후 터키로 전달된 커피는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널리 음용되었죠. 터키에서는 ‘카흐베(kahve)’라고 불렸어요. 여기서 유럽으로 전파돼 ‘카페(café)’로 불렸으며, 17세기 영국으로 건너가 오늘 날 우리가 부르는 커피가 되었다고 하네요.
유럽의 커피 전문점, 커피하우스(Coffee House)
세계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1475년 콘스탄티노플(현재의 터키 이스탄불)에 문을 연 키바 한(Kiva Han)이에요. 1529년 터키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를 침공하면서 커피가 유럽으로 전파됐고, 터키에 거주하면서 커피를 만들어본 경험이 있던 게오르그 콜쉬츠키(Georg Kolschitzky)가 비엔나에 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를 열었어요.
영국에서는 1637년 옥스퍼드 대학 발리올칼리지(Balliol College)의 연구실에서 ‘캐노피우스(Canopius)’라는 학자가 처음으로 커피를 제조해 마시면서 보급되기 시작했어요. 1650년, 옥스포드에 ‘야곱(Jacob)’이란 유대인이 영국 최초의 커피하우스를 열었습니다. 대학도시인 만큼 학생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만남의 장소로 자리를 굳혔었죠. 그리고 2년 뒤 ‘파스카 로제(Pasqua Rosee)’가 런던 콘힐(Corn Hill)지역에 커피하우스를 열었습니다. 초기 주변의 적대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런던의 커피하우스는 점차 인기를 얻어 1715년경 런던에만 2,000여 개의 커피하우스가 개점할 정도로 급속히 유행하며 영국의 역사를 바꾸는 장소가 되었어요.
당시 영국은 사업가가 별도의 사무실을 운영하는 일이 매우 드물어서, 시내의 커피하우스에 모여 대화를 나누거나 상거래를 협상하곤 했어요. 즉 커피하우스는 자유롭게 의견과 정보를 교환하는 장소로서 교역과 정치활동, 그리고 사교와 문학의 넓은 마당이 되었어요. 초기 이곳은 모든 계층의 남자들에게 문이 열려있는 신사클럽(Gentlemen’s Club)의 성격을 띄는 일종의 토론장이었어요. 커피하우스에서 1페니만 내면 커피를 마시며 장시간 동안 엘리트 지식인들과 다양한 주제의 토론을 경청할 수 있고, 고급 정보가 실린 신문이나 잡지도 볼 수 있는 등 온갖 정보를 얻을 수 있어 한 때 ‘페니 대학(Penny University)’라고 불리며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성격들이 모이며 당시 사회적 기능을 충족시킨 커피하우스는 술집과 대비되면서 영국의 언론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고, 정치•경제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죠. 대부분 커피, 차, 초콜릿, 셔벗 등의 음료는 물론 찻잎과 설탕 등도 허가를 받아 판매하였는데 커피하우스마다 판매하는 음료가 똑같지는 않았어요. 알코올을 판매한 곳도 있었지만 커피하우스 벽면에 과음과 좋지 못한 술버릇에 대한 주의가 커피와 차가 효능이 있다는 등의 내용과 함께 손님들이 지켜야 할 준수사항으로 걸려있었던 것을 보면 술을 취급하는 커피하우스는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져요.
영국 해상보험의 탄생, 로이즈(LIoyd's) 커피하우스
런던의 여러 커피하우스 중 템스 강변에 있는 로이즈 커피하우스의 인기는 매우 높았으며, 이곳이 바로 근대적 형태의 영국 해상보험이 태동한 장소에요. 로이즈 커피하우스는 1687년경 사뮤엘 로이드(Samuel Lloyd)가 처음 문을 열었고, 그의 아들 에드워드 로이즈(Edward Lloyd)가 물려 받으면서 점차 인기가 높아졌죠. 많은 사람들이 몰리자 로이즈 커피하우스는 롬바드(Lombard) 거리의 넓고 화려한 장소로 이전하였으며, 영업시간도 종일 영업에 가깝도록 대폭 늘렸어요.
커피하우스에는 사업가나 학생뿐만 아니라 항해와 관련된 사람들의 모임장소로 발전하였어요. 선원들은 바다 날씨와 만조 시간, 해적 출몰 지역, 나라별 특산품, 선박의 출항 및 도착 시간 등 각종 무역거래에 관한 정보를 교환했어요. 이 모습을 본 에드워드는 고객들의 편의를 위해 화물선의 출발 시간이나 도착 날짜 등 중요한 정보를 종이쪽지에 적어 벽에 붙여 놓았는데, 손님들의 반응이 좋자 1696년부터 ‘로이즈 리스트(Lloyd’s List)’라는 정기 정보지를 발간해 중요 정보를 제공했어요. 2면으로 구성된 로이즈 리스트는 주 3회 발행되었으며, 여러 가지 유익한 기사와 소식이 실림으로써 당시 무역상인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신문이 되었어요.
그는 해상무역 과정에서 여러 손실 리스크에 공동으로 노출되어 있던 선원들에게 보장의 필요성이 제기되자 이를 놓치지 않고 리스크를 공동 인수하기 시작하면서 언더라이터(Underwriter; 유가증권의 인수를 업무로 하는 금융업자 또는 보험계약을 인수하는 보험업자)가 되는데, 이것이 영국 해상보험의 시작이었어요.
에드워드는 정식 보험약관은 아니지만 종이 한 장(slip)에 보상내용을 약속한 뒤 하단에 서명(underwriting)을 했고, 이것이 해상보험으로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작은 종잇조각’이라는 뜻의 slip은 오늘날 보험을 가입할 때 쓰는 ‘청약서’란 용어로 사용되죠. 또한 현재 증권사나 보험사 등이 ‘위험 심사 및 인수’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언더라이팅(underwriting)’이라는 금융용어 역시 에드워드가 보험료를 받고 위험을 인수하면서 계약서의 합의조항 아래(under)에 그의 이름을 써주고(writing) 약속 이행을 확약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로이드 커피하우스의 고객 중 상업이나 선박업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보험회사 대리인 그룹이 눈에 띄게 불어났어요. 1771년에는 재력과 신뢰를 갖춘 79명의 언더라이터들이 입회비 100파운드를 납부하고 로이즈 협회(Society of Lloyd’s)를 결성하였고, 18세기를 지나면서 로이드 커피하우스는 커피하우스라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세계 최대의 보험회사인 런던 로이드(Lloyd’s of London) 회사로 성장하였어요.